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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조선시대의 관학기관

by 아몬드봉봉이 202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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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균관
 성균관은 태학, 학궁, 반궁, 현관 등으로 불리는 최고학부의 관학으로 태조 7년 한양에 설립되었다. 성균관은 문묘와 학당으로 구성되었는데, 유교의 전형적 건물 배치 양식 중 하나인 전묘후학의 구도를 띠고 있다. 문묘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과 유교 선현을 모시는 동무와 서무로 이루어진다. 학당인 명륜당에서는 수업이 행해졌고, 그 좌우에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었다. 기타 부속기관으로는 학생들의 물품공급과 숙식 제공을 맡았던 양현고와 성종 6년에 설치된, 도서를 보관하는 존경각이 있었다.
 성균관을 관장하던 관료와 교수진을 살펴보면, 먼저 최고 책임자인 지사와 그 밑으로 동지사를 두었다. 그 아래로 전임관원인 대사성, 좨주, 사성, 사예, 사업, 직강, 전적, 박사, 학정, 학록, 학유 등이 있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 진사과의 급제자를 원칙으로 하며 정원은 200명이었다. 원래 150명으로 출발하였으나 세종 11년에 50명을 증원하여, 후기에 다소 변화는 있었으나 이후 계속 이를 유지하였다. 정원이 미달할 경우, 4학의 학생 중 13세 이상이고 ‘소학’과 4서 1경에 능통한 자 가운데서 승보시를 거쳐 충원하거나, 국가에 공로 있는 자의 적자 손으로 ‘소학’에 정통한 자, 문과 및 생원, 진사시나 한성시의 초시에 급제한 자, 관리로서 입학을 원하는 자들로 결원을 보충하였다. 이렇게 하여 입학한 유생들은 유안, 즉 청금록에 그 이름을 올렸다.
 성균관의 교육내용은 독서, 제술, 습자가 주를 이루었다. 독서는 글 뜻을 밝히고 응용에 통달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4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와 5경(시경, 서경, 춘추, 예기, 주역), 여러 역사서(사기, 한서, 후한서) 등을 읽었다. 또한 9재제도를 운영하였는데, 이는 4서 5경 중 대학재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주역재로 승급하는 것이었다. 학습 기간은 대학 1개월, 논어, 맹자, 중용 각 4개월, 시경, 서경 춘추 각 6개월, 예기, 주역 각 7개월을 부여하였다.
 이때 주목할 것은 구두 발표인 강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매일 강을 하고 어려운 점을 논하고, 의문을 해결하여 학습이 철저히 이루어진 것을 본 뒤에 새로운 내용을 가르쳤다. 반복 학습을 통해 학생이 그 재질대로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는 개인 표준의 문답식이었다. 이는 당대 지식인 엘리트에 대한 말하기 교육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교수의 강은 물론, 학생이 강을 바치는 일은 서당에서부터 시작되어, 향교를 거쳐 성균관까지 비중 있게 시행되었다. 이는 사대부로서 당당한 언변술을 갖도록 한 것이다.
 성균관 교육은 성적고사도 철저하게 시행되었다.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 두 차례 시행되는 가장 중요한 연고에서부터 매월 강론으로 시행되는 월고, 열흘마다 제술로 시행되는 순고, 매일 추첨을 통해 강론으로서의 당일의 학습 내용을 평가하는 일고 등이 있었다. 평가 결과가 대통, 통, 약통, 조통, 불통의 5단계로 구분되었음은 오늘날과 같다.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비와 식대는 무상이었다. 식사뿐만이 아니라 명절에는 별미가 주어졌으며, 여름에는 저녁 식사에 얼음이 제공되기도 하였다. 과거 응시를 할 경우에는 답안지를 지급하였다.

2) 4학
 4학은 수도인 한양에 설치된 중등 교육기관 성격의 관학인 4개의 학당, 즉 동부, 서부, 남부, 중부 학당을 말한다. 고려조의 5부 학당을 계승하였으나 세종 20년에 북부학당은 폐지되고 이후 동, 서, 남, 중부의 4학으로 정비되었다. 태종 11년에 설치되기 시작하여 세종대에 들어서 4학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는 왕도의 교육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서, 성균관에 문묘가 있기 때문에 문묘를 따로 설치하지 않았다.
 교수 요원으로는 교수 2인, 훈도 5인 등이 있었다. 그러나 관료인 이들이 4학으로 배치되는 것을 한직으로 알고, 여기에 교관의 대우가 좋지 않자 발령 즉시 이임을 빈번히 하였다. 이에 성종 8년에는 30개월 이상의 근속을 명하는 구임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학생의 정원은 각 100명씩이었다. 학생들의 이름은 청금록에 올랐으며 군역 등을 면제하는 대신,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는 특권을 줬다.
 교육내용은 ‘소학’을 포함하여 4서와 5경, 여러 역사서와 ‘근사록’, ‘심경’, ‘주자대전’, ‘가례’ 등을 공부하였다. 특히 ‘소학’은 필수과목으로 중시되었으며, 성균관에 진학하기 위한 승보시의 중요한 시험과목이었다. 4학의 유생들은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과 생원, 진사시의 합격을 목표로 삼아 강과 제술 등을 공부하였다.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를 주어 4학의 교육활동을 장려하였지만 운영이 철저하지 못하고 폐단이 많아 효과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결과 1894년에 폐지되었다.

3) 향교
 지방의 유일한 관학인 향교는 중앙의 4학에 준하는 교육기관이면서 동시에 지역의 향풍을 진작시키는 기관이었다. 조선조 건국과 동시에 유학적인 건국이념을 뿌리내리기 위하여 태조 1년에 즉시 지방 교육의 진흥을 독려하였다. 이를 흔히 태조 원녀의 ‘흥학교령’이라 하는데, 그 내용은 학교의 흥폐로 지방 수령의 고과 점수를 매기겠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지방의 부목 군현에 1교씩의 향교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세종대에 이르러 거의 완결되었으며, 1918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335개소가 설치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모든 향교에는 문묘와 함께 강의동인 명륜당, 교생이 기거하는 동, 서재가 구비되어 있었다. 교수 요원은 큰 군 이상의 경우 교수 1인, 훈도 1인, 작은 군현의 경우 훈도만 두었다. 입학 정원은 도, 대도호부, 목은 90명, 도호부 70명, 군 50명, 현 30명 등으로 차등을 두었다. 입학 연령은 16세 이상으로 정하였다.
 교육내용은 4학과 대동소이하며, 지방에 따로 잠사나 농사법 등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생들의 독서 일과를 월말마다 해당 지역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관찰사가 순행하여 강을 받고 법에 따라 장려와 징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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