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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고려의 사학기관과 교육사상가

by 아몬드봉봉이 2022.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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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의 사학기관
1) 12공도
 고려의 사학은 문종 대에 설립되기 시작한 12개의 사학, 즉 12 공도가 대표적이다. 문종 대의 사학 설립 추세는 거란과의 오랜 전쟁과 불교 세력의 득세에 따라서 국자감이 유명무실화되자 이를 우려한 고위 관료 출신의 유학자들이 후진양성을 위한 사학 설립에 매진한 결과였다. 설립자들의 공통점은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에 대부분 고위 관직을 역임하고, 특히 과거 시험관인 지공거를 거친 자들이라는 점이다. 이에 따라 과거를 준비하기 위하여 공부할 곳을 찾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모여들게 되어, 과거 출신자들이 이들 사학으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이로써 견고한 학맥을 형성하면서 결국 사학은 고려 귀족 사회와 부침을 같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관료 사회의 균형이 사학 출신자들로 기우는 현상을 초래함으로써 그 결과 예종 대의 국자감 진흥책을 통한 왕권 강화책이 모색되었다.
 12공도 중 최초는 최충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문하시중을 역임한 정치가로서 관직에서 물러난 후, 문종 9년에 자신의 사랑채에 사숙을 열어 부진한 유학의 진흥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는 이 사숙을 악성, 대중, 성명, 경업, 조도, 솔성, 진덕, 대화, 대빙 등의 9개의 재로 나누어 이를 9재라 칭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최충의 9재 학당의 교육 내용은 9경과 3사, 제술 등 이었다. 9경은 역경, 서경, 시경,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등으로 파악된다. 3사는 역사서인 사기, 한서, 후한서를 말한다.
 9재 학당의 교육 방법은 여름에는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하과를 개최하고, 각촉부시라고 하는 시작회를 열어 즐기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하과는 매년 여름 산속의 사찰 승방을 빌려 그곳에 기거하며 일종의 연수회를 가진 것을 말한다. 각촉부시는 초에 금을 그어 놓고 초가 그 금에 탈 때까지 시간을 다투어 시를 짓게 하는 방법으로 과거시험을 대비한 시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유학의 생활화에 주력함으로써 실용적 관료학에 머물던 종래 유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일조하였다. 그로부터 조선 유학이 흥기하였으므로 후학들이 이를 칭송하여 최충을 ‘해동공자’라 추앙하였다.
 최충이 설립한 9재 학당 즉 문헌공도가 명성을 얻으면서 이를 본받아 명망 있는 학자들이 11도를 잇달아 세웠다. 12도는 하과, 각촉부시 시행 등과 더불어 학도 중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학업이 우수하며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을 택하여 교도로 삼았다. 이에 과거를 보려는 학생들이 관학보다 12도를 더 선호하기도 하였다. 12도는 공양왕 3년에 폐지될 때까지 고려시대의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2) 서당
 고려의 서당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인종 2년에 송나라 사신 일행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이 일종의 견문록으로 작성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일종의 서당과 같은 교육기관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 거리에는 경관과 서사가 두세 개씩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민간의 미혼 자제가 무리를 이루어 스승에게 경서를 배우고, 

좀 더 성장하면 각각 저희끼리 벗을 택하여 절간으로 가서 강습하고, 

아래로 서인이나 아주 어린 아이까지도 역시 향 선생에게 배운다. 아아! 성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려 중기에는 서인까지도 향 선생에 나아가 배우는 초급의 사설 교육 기관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으나 그 구체적 정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민중에까지 교육의 파장이 미치고 있다는 증거를 일부 확인함으로써 전체 민중에 대한 사상적 포섭 관계가 훨씬 넓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조선 왕조 교육체제의 기초가 전 왕조인 고려에서 이미 다져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고려의 교육사상가
1) 최충
 최충은 고려의 문신으로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로 불렸다. 목종 8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현종, 덕종, 정종, 문종 네 조정에 역사하였다. 문종 7년에 중서령으로 퇴임한 후에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를 문헌공도라 하였다. 이 학교에 교실이 9개가 있어서 9재 학당으로 불리었으며 성인의 도를 교육의 본질로 삼았다. 

2) 지눌
 지눌의 호는 목우자로 1158년 동주에서 태어났다. 16세경에 출가하여 25세에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정혜쌍수’를 주장하여 선교 합일의 이론을 세워 한국 불교의 독특한 전통을 닦았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추구하였다.
 그의 사상 가운데 교육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수행 방법으로서의 돈오점수이다. 돈오는 순간적 깨달음으로 자기의 본성인 불성을 깨닫는 것을 말하고 점수란 이 깨달음에 의하여 점차 수행을 거듭하여 자각이 완전히 인격화 되어 삶 속에서 구현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돈오를 통해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자신의 오랜 습관이 일시에 변화하는 것이 아니므로, 계속된 수양을 통해 자각을 내면화하고 삶 속에서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3) 안향
 안향은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으로 고려 학자로는 최초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46년간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충렬왕 11년에 원나라의 연경에서 ‘주자전서’와 공자와 주자의 상을 그려가지고 와서 주자학 즉,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였다. 귀국 후에는 국자감에서 성리학을 강의하였다. 그는 주자를 매우 존경했기 때문에 그를 성인으로 받들어 제향하였다. 62세 때에 성균관의 대성전이 낙성되니, 이진으로 하여금 경사교육을 하고 직접 글을 지어 여러 생도를 깨우쳐 유학의 기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그의 교육사상을 철저히 성리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국자감생들에게 “공자의 도를 학습하려면 먼저 주자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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